burying museum
밀린 영화들
cien_
2007. 4. 1. 15:50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한다' 가 원칙이지만
요즘은 시간이 녹록치 않다 -
혼자보고 싶은 영화가 있고 혼자 보는게 더 편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그렇지 않은 영화가 있을 때는 극장에 잘 안가게 된다.
다운 받은 영화 세편을 이틀동안 봤다는 것에 대한 사변이 너무 길어져버렸다
우선 stranger than fiction.
나에게
아마 이십년뒤쯤의 너는 엠마톰슨 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
라는 메일에 그가 보내온 첨부파일.
묘비명을 해석하다보면
단 몇줄의 문장에서도
때때로 그 혹은 그녀의 눈코입이 손앞에 매만저질듯 그려지기도 하고,
그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상상되곤 한다.
수 백년전의 여인들은 이름조차 없어 김씨부인, 유씨부인 정도의 인식대상이었다.
연애결혼 시절이 아니었던 남편들에게도 그녀들은 대부분이 자신의 씨앗을 받는 존재정도였을뿐.
그런 시절에 죽은 아내를 그리워 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몸과 마음의 시름을 견디지 못하고 아내 옆에 묻힌 한 남자의 묘비명에서
나는 그의 일생을 그린다.
꿈속에서 나는 그의 묘비명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그리고 그를 만난다.
허구속에서 만난 허구의 그가
나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주세요' 라고 말한다.
실재 하는 그가 나의 소설속으로 들어오면
그는 실재인가 허구인가.
그를 죽여야만 그녀의 소설은
아마도 그녀의 일생일대의 '역작' 이라고 할만큼의
빛을 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죽는걸 알게 되고 그걸 막을 수 있는데도
기꺼이 죽겠다는 남자라면 당신이라도 그런 남자를 살리고 싶지 않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저 '소설이 괜찮다' 정도면 만족하겠다고 했다.
그의 비극의 생이 그녀를 통해 빛을 얻는 순간 이었다.
그의 혈관에 박힌 손목시계의 조각이 내 가슴에 박힌 느낌이었다.
가끔 소설속의 '그'를 사랑하게 되버리곤 한다.
그저 허상이고 망상이지만 어느 순간 그가 내 앞에 나타나 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거다.
'당신은 위한 여러가지 종류의 밀가루에요'
그 장면이 너무 좋았어.
그리고 향수.
귀로 느끼는 영화가 있고
피부로 느끼는 영화가 있고
빛으로 느끼는 영화가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냄새로 느끼는 영화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건가.
영화화 된다는 소식에 난 또하나의 '소설망치기' 영화가 탄생하겠다 싶었다.
사실 난 유명한 소설을 영화화 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적적인 입장은 아니다.
물론 소설은 영화로 만들기에 더할나위 없는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화 한 소설은 원작 자체를 결코 뛰어넘지 못한다.
물론 영화가 꼭 원작 소설을 뛰어넘어야만 하느냐.
영화는 영화일 따름이고 소설은 소설이지 않겠냐. 하면 할말이 없다.
그저 나는 내가 머릿속에 그려넣은 나의 그. 그녀. 그리고 그곳이
눈앞에 너무 허무하게 엉망으로 보여지는 것이 속상할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향수는
굉장히 '냄새'에 충실한 영화였다.
생선시장통의 첫 장면은 너무 리얼해서 마치 코 앞에 생선대가리를 가져다놓은 것처럼
여차하면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빛을 통한 냄새의 발현.
아 이정도면 충분해. 라고 말 할수 있었다.
빨간머리의 소녀들도 육감적이고 정말 등뒤로가 코를 벌름 거리며 향을 맡으면
알싸하고 달콤한 향기가 날 것 같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루누이역 배우의 '킁킁' 거리는 연기도 훌륭했다!
그래 이 영화는 여기까지 였다.
쥐스킨트의 흡입력 있는 문장들을 빛으로 풍경으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따르리라.
제법 두꺼운 소설 한권을, 물론 짧지 않은 두시간 남짓의 러닝타임이긴 했지만
한 편의 영화로 담기에도 조금은 벅찼으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little children'
메신저로 접속하자 마자 말을 건다.
'케이트윈슬렛의 전라 정사신이 나와!'
이봐 - 내가 케이트의 전라장면에 눈이 반짝여야 하는거야 당신처럼?
아 물론.
난 케이트를 사랑한다.
사실 내가 어릴적부터 사랑해 마지 않은 그녀는 위노나 라이더 이지만
얼마전에 깨달은 사실은 난 십대의, 이십대의 아름답고 청순한 노니를 사랑한 것이다.
삼십대의 노니는, 스트레스성 절도를 일 삼고 삐적말라 불치병이라는 소문이 도는 노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케이트.
병적인 다이어트에 집작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 사이에서는 조금 통통하리라 느껴질만큼의
비교적 덜 착하지만 아름답고 부드러운 선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파티에 열광하지도 않고
경솔한 말을 내뱉지도 않으며
인기와 돈에 연연하며 '아무'영화나 찍지 않는
그녀가 ,
쓸쓸한 그녀의 눈빛은 그녀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리틀 칠드런은 '제자리찾기'에 관한 영화였다. 그리고 이해와 용서에 관한 영화다.
그와 그녀가 찾은 그곳이 정말 그들의 '제자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자기자신을 이해했고 상황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였으며
서로를 용서했다.
삶이 무료하고
해가 뜨고 그리고 지는 것으로 하루를 인식하는 나날들의 반복.
문득 우리가 꿈꾸는 일탈이 독이되어 나도 모르게 나의 잔에 떨어진다.
그리고 나 자신만 모르게
그 독배를 든다.
주홍글씨의 낙인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불로 달군 인두의 흔적만 없을 뿐이지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찍혀있다.
그리고 우리는 돌을 던진다.
피가 나진 않지만 그들의 상처는 분명하리라.
그남자, 엄마가 죽자 칼로 자신의 성기를 잘라내고 아무도 없는 그네에 앉아
울고 있는 그남자를 보며
나도 누군가에게 돌을 던진 적이 있을텐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허구의 그에게 너무 미안해 어쩔줄 몰랐다.
피가 뜨거웠던 기억.
사랑의 흔적들
그래도 삶은 계속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