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 하지 않았던 일들이,
차마 잊고 있던 좋은 일들이,
한꺼번에
터져버릴때가 있는거다.
아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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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은 모두 상징이다.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일은 패턴의 일부이며, 우리는 이 패턴에 대해 적어도 약간의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
강자는 자기 자신의 패턴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의 패턴에 영향을 끼치고, 약자에게는 이미 정해진 진로가 주어진다.
약하고, 운이 나쁘고, 어리석은 자들의 경우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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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은 달리다말고 멈춰 섰다. 갑작스러운 속도의 변화로 균형 있던 호흡이 흐트러졌다. 한참동안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소진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비릿한 하천의 냄새가 가쁜 숨과 함께 기도를 타고 허파로 들어왔다. 흉부에 자리 잡은 두개의 허파가 배를 가른 물고기의 그것처럼 움찔거렸다. 그 비릿한 냄새 때문에 소진은 어릴 때 살던 포구 근처의 갑판장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기억이라는 것은 방금 전 낚시 바늘에 꿰어 호되게 당하고도 금세 다시 진홍색 몸통을 나풀거리는 미끼바늘에 자신의 주둥이를 가져다 대는 물고기의 ‘10초 망각의 구조’처럼 필요에 의해서만 존재하였지만, 때때로 뜻하지 않은 일로부터 잠들어 있던 기억이 깨어나기도 하는 것이었다.
대학입시를 실패하고 재수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소진의 엄마는 과외를 시켜주고 싶지만 형편이 안 된다고 미안해하며 유명한 강사가 있다는 노량진 단과 학원의 수강증을 끊어다 주었다. 학원을 가기 위해서는 수산시장을 지나쳐 가야했고, 그때마다 소진은 받쳐 오르는 헛구역질을 참으며 숨을 멎은 채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소진은 바다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싫었다.
소진이 어릴 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젠 겨우 몇 척의 배들만이 드나드는 조그만 포구 근처에서, 고기를 잡아 들어오는 어선의 잔챙이 생선들을 사오거나 얻어 와서 회를 뜨고, 남은 뼈로는 매운탕을 끓여 파는 조그만 가게를 했다. 좁은 가게여서 따로 일하는 사람 없이 그녀의 아버지가 회를 뜨고 매운탕을 끓였고, 그녀의 엄마는 손님들의 상에 밥과 술을 날랐다. 어린 소진은 주방에서 회를 뜨는 아버지 옆에서 구경을 하곤 했는데 기분이 좋은 날에 그녀의 아버지는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회를 뜨고 난 생선을 물속에 넣어 소진에게 보여 주었다. 살만 발라진 그것은 심장을 헐떡거리며 한참을 꿈틀거리다가 뼈와 내장기관만 남은 몸뚱이와 지느러미로 물속에서 헤엄쳤다.
“아빠 얘는 몸에 살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헤엄을 쳐?”
“그놈의 심장이 뛰잖어. 심장만 뛰면 살어”
“그럼 사람은? 사람도 심장만 뛰면 살아?”
“그러엄. 사람이고 물고기고 심장만 뛰면 사는 거야”
어린그녀가 신기해하며 물속을 쳐다보고 있으면, 그녀의 엄마는 얼른 주방으로 들어와 소진의 손을 붙잡아 이끌고 나가며 아버지를 질책했다.
“당신은 어린 애 데리고 뭘 하는 거예요. 아무리 사람 뱃속에 들어갈 거라고 해도 그 녀석들도 살겠다고 버둥거리는데 불쌍하지도 않아요?”
엄마가 그렇게 말을 하면 그녀의 아버지는 물속에서 헤엄을 치던 물고기들을 서둘러 끓는 물에 넣었다. 그러면 금세 그것은 몸이 뻣뻣해져 맥도 못 추고 손님들의 술 상위로 올라갔다.
포구에 배가 거의 드나들지 않자, 가게에도 손님이 뜸했다. 포구는 거의 폐허가 되었고, 가게도 할 수 없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손님들의 술상에 오르던 술을 자신이 마시기 시작했다. 매운탕도 없이 그는 텅 빈 가게에서 막소주를 들이켰다. 그녀의 엄마는 생선을 담은 상자를 이고 시장으로 팔러나갔다. 분 냄새가 나던 엄마의 몸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났다. 술을 많이 마시고 온 날이면, 아버지는 엄마의 몸에서 생선비린내가 난다며 가까이는커녕 안방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그러면 그녀의 엄마는 군불도 들어오지 않는 건넌방으로 건너가 잠을 자야했다. 어린 소진은 술을 마시는 아버지도, 생선비린내가 나는 그녀의 엄마도, 그리고 엄마가 파는 생선도 싫었다.
포구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마지막 배마저도 조업을 포기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그날 밤에 그녀의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추운 건넌방에서 자던 그녀의 엄마는 오랜만에 따뜻하게 안방에서 이불을 덮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소진은 엄마의 몸에서 생선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서 자다 말고 이불을 싸들고 바닥에 불이 안 들어오는 건넌방으로 건너갔다.
다음날 아침, 그녀의 아버지는 버려진 생선더미에 머리를 박은 채로 발견되었다. 질식사였다. 경찰은 술을 많이 마신 그녀의 아비가 술에 취해 생선더미에 쓰러져 얼굴이 파묻혔는데 미처 고개를 빼내지 못해 추운 날씨에 숨이 막혔을 것이라고 했다. 생선더미에서 빼낸 그녀의 아버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온몸이 뻣뻣해져있었다. 마치 끓는 물속에 갑자기 넣어 굳어버린 생선처럼.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고 소진과 그녀의 엄마는 서울로 올라왔다. 집도 팔고 가게의 전세도 빼냈지만 그 돈으로는 서울에서 전세방조차도 얻기 힘들었다. 식당으로 일을 하러 다니던 엄마의 몸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분 냄새에, 좋은 향수냄새도 나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으면 다 잘 될 거야”
향수냄새보다 술 냄새가 더 짙게 나는 날이면 그녀의 엄마는 흐느끼며 조금만 참자고 했다. 하지만 소진은 그럴 때마다 그녀의 엄마가 도대체 무엇을 참자고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소진은 그를 학원에서 만났다. 대학입시를 실패하고 학원에서 사무보조를 하며 그 장학금으로 학원을 다니고 있는 그는, 역시 재수를 하던 그녀에게 어느 날 문득,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고, 함께 간 식당에서는 그녀에게 묻지도 않고 생선구이와 김치찌개를 시켰다. 비릿한 기름 냄새에 속이 메스껍던 그녀는 결국에 그가 생선의 옆구리에 젓가락을 갖다 대는 것을 보고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입안에 가득 맴도는 아침밥의 부유물에서 쉰 냄새가 올라와 더 이상 참지 못한 그녀는 입을 막은 채 식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왜 그래요?”
젓가락을 손에 쥔 채로 그는 밖으로 따라 나와 물었다.
“아니예요. 들어가서 점심 먹어요. 아침 먹은 속이 좋지 않았나 봐요”
시큼한 침만 계속 나왔다. 식당으로 도로 들어간 소진은 물로 입을 헹구고 푹 퍼져버린 김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밥을 먹었고, 그는 그런 소진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도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밥그릇만 쳐다보며 점심을 먹었다. 소진은 밥과 김치를, 그리고 그는 생선구이를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은 채 깨끗이 발라 먹었다. 마치 처음부터 접시위엔 생선의 뼈만 있었다는 듯이.
그날 이후로 그들은 매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여전히 그는 소진에게 묻지도 않은 채 생선구이를 시키고 때로는 오징어볶음, 매운탕 같은 것을 시켰다.
“바다 좋아해? 난 누가 산에 갈래. 바다에 갈래 하면 무조건 바다로 간다. 왠지 알아? 별 이유는 없어. 그냥 난 해산물이 좋아. 그래서 바다도 좋은 거야”
그가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가 우스웠지만, 그래도 소진은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비록 그 때문에 그녀는 늘 기본 반찬으로 나오는 나물이나 김치를 가지고서만 밥을 먹어야 했지만.
그는 한 달쯤 점심을 함께 먹었을 즈음부터 말을 놓기 시작했다. 워낙 말이 없는 그녀도, 그리고 그도 밥을 먹으면서 서로 말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는 소진에게 질문을 해놓고도 늘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넌 왜 늘 채소하고만 밥을 먹어? 다이어트 해? 지금도 말랐는데 다이어트가 왜 필요해. 지금 보기 좋은데. 그냥 골고루 먹어 ”
딱 한번 그가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소진은 채소만 먹는 것이 아니고 바다에서 나는 것들은 무조건 싫다고 그리고 먹지도 못한다고, 그러니까 가끔은 생선 말고 다른 것들도 먹자고 말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그는 그 질문 역시도 자신이 혼자 답을 해버렸다. 할 수없이 소진은 그저 그의 말에 빙긋이 웃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점심을 다 먹고 학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진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저 마치 허공에,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 있는 듯이 앞만 뚫어져라 쳐다본 채로 걸어갔고, 소진 또한 잠시 동안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그의 손을 한번 꼭 쥐고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넌 손이 참 따뜻하네. 난 늘 손이 찬데”
둘은 보통의 젊은 연인들이 하듯, 영화를 보던, 놀이공원에 놀러가던지 하는 그런 데이트 같은 것은 한 적이 없었다. 그저 학원에서 점심을 함께 먹고 수업이 끝나면 그녀는 집으로 그리고 그는 학원의 뒷정리를 하는 것뿐이었다. 소진은 수능시험만 끝나고 나면 그와 함께 영화도 보고, 콘서트나 놀이공원에 갈 생각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진의 기대는 수능 시험이 끝난 다음날에 그의 전화로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우리 바다 보러가자”
소진은 한 번도 그가 하는 말에 싫어. 라고 대답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바다는 죽어도 가기 싫었다. 고향에서 떠나 온 후로 소진은 한 번도 바다에 간적이 없었다. 영화도, 놀이공원도 아닌 하필이면 바다라니. 그것도 겨울바다라니. 그러나 소진은 싫다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싫다’ 라고 말하는 순간 그들이 이제껏 함께 지내온 날들이 그저 낮잠에서 깨어져 버릴 달콤하고 아득한 꿈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내일 밤 열시에 서울역 앞 광장에서 만나”
그는 그녀의 의견을 물어보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소진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런 그의 말투는 그녀가 그를 좋아하는 것만큼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다.
소진은 자신이 우주들 떠돌다가 우연스럽게 이 땅에 내려앉은 별의 망령이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커다란 별이 산산이 조각날 때 우주가 생성이 되면서 그 수많은 파편들이 우주의 별이 되었고, 땅에 내려앉은 그것의 먼지들이 생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와 그녀가 하나의 별에서 떨어져 나온 불완전한 영혼인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언제나 그녀가 상상하는 그림 속에는 둘이 함께였다. 소진에게 있어 그는 자신의 존재의 일부분인 것만 같았다.
기차 안에서 그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손을 꼭 쥔 채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고 있는 창에는 차안의 불빛과 그 불빛에 반사되는 그의 얼굴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창밖만 노려보고 있었고, 그녀는 창에 비치는 그의 얼굴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철커덕. 철커덕. 기차안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창밖만 바라보던 그도 어느새 창에 머리를 기대고 기차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를 박아가며 잠을 자고 있었다. 소진은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러나 뒤척이던 그는 자연스럽게 도로 창에 머리를 대고 잠을 잤다. 어쩌면 그가 자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소진은 생각했다. 그녀도 때때로 엄마가 술을 먹고 유난히 힘없는 걸음으로 들어오는 날에는 잠이 들지도 않았으면서 엄마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기가 싫어 눈을 꼭 감고 미동조차 하지 않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가 왜 그녀와 말을 하기 싫어서 잠을 자는 시늉을 하겠는가. 아니다. 그는 그저 내가 불편해 할까봐 고개를 돌리고 잠들었을 것이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이 차갑게 보인다는 첫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턱과 그 턱에 조그맣게 보이는 흉터, 그리고 위로 뻗은 눈매와 눈썹. 그러나 그녀는 그의 얼굴 중에서 그 눈썹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눈썹?”
소진이 자신은 그의 얼굴 중에 눈썹이 제일 마음에 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너는 내 눈썹이 내 얼굴 중에서 제일 멋있다는 말이지?”
“응. 다듬는 것도 아닌데 눈썹이 어쩌면 그렇게 예쁠까. 적당한 간격에 적당한 두께에 꼭 다듬은 여자 눈썹 같아.”
“정말 내 눈썹이 멋있나. 저번에 어떤 사람도 나한테 내 눈썹이 예쁘다고 했었는데.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 누군가를 만나서 어떤 관계를 맺기 전에 다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의 기분이 좋을까 생각을 하면서 칭찬해줄 거리를 찾나봐. 난 참 칭찬할게 없나보다. 눈썹이 예쁘다는 소리를 두 번이나 듣다니 .”
그는 그녀에게 거울을 달라고 하고는 자신의 눈썹을 보며 얼굴을 좌우로 돌려가며 한참을 웃었다. 정말 넌 눈썹이 멋진걸. 소진은 그에게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난 네 어디가 좋은지 안 궁금해?”
그녀는 그런 식의 그의 물음이 평소의 그 같지가 않아서 낯설면서도 한편으론 기뻤다.
“넌 내가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면 항상 내 얼굴을 쳐다봐. 그러다가 내가 고개를 돌리면 재빨리 다른 곳을 보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걸 눈치 채는지 알아? 넌 얼굴이 빨개지거든. 귀부터 목까지 새빨개져. 처음 그 모습을 본 날 네가 좋다고 생각 했어”
소진은 그가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하며 그녀에게 다가왔을 때 그가 조르바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소설속의 ‘조르바’라는 인물은 실제 인물이 있었다고 했지만 그의 사진을 직접 본 적은 소진은 젊은 시절의 조르바가 꼭 그처럼 생겼을 거라고 확신했다. 조르바는 그녀에겐 첫 사랑이나 다름이 없었다. 처음 그 책을 읽은 날, 그녀는 살아있는 조르바를 만난 것 같이 희열에 넘쳤고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르바는 그녀가 꿈꾸는 자유를 몸으로 보여주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역시 그럴 것만 같았다. 그것이 그녀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그리스 인 조르바 라는 책 읽어봤어?”
“아니, 난 책 별로 안 읽는데”
“거기에 나오는 조르바라는 사람이 너랑 닮았어”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다음날 그 책을 선물했다.
“너와 조르바를 만나게 해주고 싶어. 네가 그를 그가 있는 크레타 섬의 해변에서 만나던, 꿈꾸는 숲에서 만나던, 언제라도 그를 만났으면 좋겠어. 그럼 너도 그를 좋아하게 될 거야”
그는 그녀에게 아직도 소녀시절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을 한번 톡 치며 웃었지만 소진이 알고 있는 한 그는 한 번도 그 책의 책장을 넘겨 본 일이 없었다.
창밖으로 희미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창에 머리를 부딪쳐가며 졸고 있었지만, 소진은 그가 그녀의 손을 꽉 쥐고 있는 바람에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바라보고 있었다. 객차안의 공기가 너무 탁해서 바람이 쐬고 싶은 소진은 객차끼리 연결되어 있는 통로로 나갔다. 실려 오는 바람에서는 너무도 익숙한 바다냄새가 섞여있었다. 소진은 속이 메스꺼웠다. 오랫동안 맡은 적이 없는 냄새였는데도 기억은 때때로 심연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는 돌덩이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어릴 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달콤한 꿈을 무참히 깨버리며 잠이 덜 깬 그녀의 손을 잡고 포구로 나갔다.
“저기 좀 봐라. 저기 구름들 사이로 뭔가 이글거리지 않니. 잘 봐 저게 뭔지”
“아빠는 참. 내가 바본가. 해 뜨는 거잖아.”
“그렇지. 우리 딸 참 똑똑하네. 해가 뜨고 있어. 봐라. 시커먼 바다가 점점 푸르게 변하고 있는 모습을, 태양을 따라 그 주위가 붉게 타오르는 것을. 지금은 내가 포구 한 구석에서 겨우 네 주먹만 한 식당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 이 아빠는 말이다. 저 태양을 여기가 아닌 바다 위에서 볼 거다. 어때 우리 딸, 아빠랑 같이 너도 바다위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거지 ?”
“응응. 나도 꼭 데려가. 근데 아빠 엄마는 안 데려가?”
“허허. 엄마도 당연히 데려가야지”
그렇게 잠을 깨워 포구로 데려간 아버지는 항상 같은 소리를 했었다. 언젠가 바다위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볼 거라고.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 소망을 결국에는 이루지 못하였다.
소진이 잠시 옛날 생각을 하는 동안에 어느새 날이 환하게 밝았다. 태양이 그 미명을 드러내더니 아직 어둡던 그 주위가 태양의 빛을 쫒아 온통 환해지는 것은 찰나였다. 그들이 가기로 했던 강릉도 이제 몇 분후면 도착할 것이었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잠에서 깨어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났네. 잘 잤어?”
“응. 어디 다녀와?”
“그냥 잠깐 바람 좀 쏘이러. 한 십분 이면 도착한대”
“응”
그는 어쩐지 말을 아끼고 있었다. 분명 그의 눈빛은 소진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녀는 언제나 그가 말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걸 알아채서, 그는 물론이거니와 그녀 자신도 놀라곤 하였다. 하지만 지금, 소진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삼십분쯤 가자 해수욕장이 나왔다. 평일인데다가 버스를 타고 제법 오래 들어온 곳이라 그런지 그물을 손질하는 마을사람 몇을 빼고는 바닷가에는 둘뿐이었다. 아직 11월이었지만 바닷바람은 제법 차가워 10분도 서있지 않았는데 둘 다 코끝이 빨개지고 귀가 아려왔다. 그가 아침을 먹으러 가자고 그랬고 둘은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여기 매운탕 작은 걸로 하나 주세요. 공기 밥 두개두요”
휴대용 가스렌지에 낡은 양은 냄비가 올려졌다. 고춧가루를 듬뿍 넣었는지 국물이 새 빨갛고, 그 속엔 살이 도톰하게 오른 토막 난 생선 한 마리와, 두껍게 썰어놓은 무, 그리고 쑥갓과 대파가 들어있었다. 찌개가 끓자 그는 밥그릇의 뚜껑을 열고 밥을 한 수저 떠 넣고 국물을 후후 불어 밥을 먹기 시작했고, 소진은 찌개에 딸려 나온 김치와 콩나물을 집어 먹으며 밥을 먹었다. 그런 소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그녀의 앞에 놓인 그릇을 집어 국자로 생선 한 토막을 덜어 주었다.
“괜찮아. 너 먹어.”
그는 그녀의 말에 아무대답 없이 자신의 그릇에도 한 토막을 올려놓고 살을 발라 먹었다. 둘은 서로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소진은 그를 보며 웃었고, 그는 잠시 그녀를 응시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먹던 밥을 다시 먹었다. 제법 긴 시간동안 아무 말 없이 숟가락으로 밥을 떠 입에 가져가고, 그는 매운탕에 그녀는 김치에 젓가락을 가져가기를 반복 하고나니 두 사람은 밥그릇은 물론 그가 먹던 찌개와 반찬 그릇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두 사람의 빈 그릇위에 남은 것은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둘은 다시 바닷가로 나갔다. 구름에 가려졌던 햇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정수리는 뜨거웠지만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고, 걸을 때마다 거친 숨과 함께 하얀 입김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말없이 앞만 보고 걸었고, 소진은 앞만 보고 걸어가는 그의 등을 보고 걸었다. 한참을 걸어가던 그가 멈춰서더니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모래위에 깔았다.
“여기앉아”
그가 벗어 놓은 코트 위에 둘은 나란히 앉아 눈앞의 바다를 바라봤다. 소진은 코트위에 두르고 있던 숄을 벗어 그의 어깨에 둘러줬다. 또 다시 바닷가엔 두 사람의 침문만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바다만 바라보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소진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앞을 봤다. 목 뒤가 뜨거워져왔다. 그녀는 바다를 보고 있었지만 온통 신경이 그에게로 쏠려있었다. 태양의 빛을 빨아들인 듯 표면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고 있었다. 살아 있는 물고기의 비늘이 저 같으리라.
포구에 한창 배가 많이 들 때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생선을 잡아 오는 배들로 언제나 포구는 사람이 많았다. 멸치잡이 배들이 만선으로 들어올 때면 두 척의 배를 나란히 세워놓고 인부들은 서로 마주보며 그물을 들고 힘차게 털었다.
“어이야. 어이야.”
구령에 맞춰 멸치를 털면 성질이 급한 멸치란 놈은 작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제 성질에 못 이기고 금방 축 쳐져 버렸다. 멸치 떼가 온 몸을 부르르 떨 때도 이렇게 눈이 부시도록 반짝거렸다. 소진은 눈앞에 마치 멸치 떼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나 어릴 때 바닷가에 살았었어.”
바다만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 동네에는 조그만 포구가 하나 있었는데, 부모님은 거기서 조그만 가게를 하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엄마랑 둘이 서울로 올라 온 거야”
그는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너 처음으로 어릴 때 얘기 했다. 전엔 그런 얘기 한적 없어.”
시간이 깊어 갈수록 둘의 침묵도 깊어 갔다. 한참 동안 조상(彫像)처럼 말없이 앉아 있던 소진은 그의 손을 잡았다. 항상 따뜻하던 그의 손이 유난히 차가웠다.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를 내려 봤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 바라보던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숄을 벗어 그녀의 목에 둘러주고 코트에 묻을 모래를 털어내고 다시 입었다.
아침을 먹은 식당 2층에는 작은 민박집이 딸려 있었다. 아침과 똑 같은 메뉴로 점심 겸 저녁을 먹은 그는 소진에게 먼저 올라가서 쉬고 있으라며 자신은 좀 더 산책을 하겠다고 하고,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은 소진을 식당에 혼자 남겨두고 나갔다.
“애인이 왜 저렇게 무뚝뚝하대. 아가씨 재미없겠어. 저런 남자랑 연애 하면”
실없는 가게 주인의 농담에 그저 어색하게 웃고 소진은 방 열쇠를 받고 올라갔다. 허름한 침대 하나에 거울이 딸린 화장대 하나, 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네의 ‘해돋이’ 그림이 있는 액자가 방에 있는 것의 전부였다. 4절지 도화지만한 창문으로는 태양빛을 따라 익어가는 바다가 보였고, 그리고 그가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익어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진은 크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욕실은 방 보다 더욱 형편없었다. 욕실이라고 하기 보다는 화장실에 샤워기가 하나 달려 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귀퉁이가 깨진 변기위엔 수건이 하나 개켜져 있었고, 흉물스럽게 큰 거울에는 방의 거울에 붙어 있음이 맞을 듯 조개모양의 등이 양쪽에 켜져 있었다. 반쯤 쓴 비누가 한참 동안 사람이 들지 않았음을 보여주듯 틈새가 벌어진 채 갈라져 있었다. 바닷물을 온몸으로 빨아들인 듯 무거운 기분이 들어 소진은 샤워를 하려고 욕실로 들어왔지만 애꿎게 손만 씻고는 그냥 나왔다. 나와서 보니 방의 거울 옆에도 화장실과 똑 같은 조개모양의 등이 두개 붙어 있었다. 문득 조개 모양의 등이 우스워 소진은 피식하고 마른 웃음을 지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가 그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 밀어 그를 찾고 있는데 등 뒤에서 문소리가 들렸다. 머쓱하게 웃는 소진을 보며 웃는지 우는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그는 욕실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고 나서 한참동안 물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에 그가 나왔다. 그리고는 벽을 향해 누웠다. 소진은 그의 등에 자신의 등을 맞대고 누웠다. 그가 숨을 쉴 때 마다 미세하게 그의 등이 들썩였고, 그와 등이 맞닿은 소진의 등도 함께 들썩였다.
“너의 침묵이 점점 숨이 막혀와”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난 바다가 싫어. 바다와 관련된 모든 게 싫어. 생선구이도 싫고, 매운탕도 싫어.”
그가 뒤척이더니 뒤돌아 누웠는지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불어와 소진의 등을 간지럽게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손을 펴 소진의 등에 갖다 대었다.
“앞으론 다른 것도 그렇게 얘기해”
그리고는 다시 뒤로 돌아누웠다. 소진은 돌아누운 그의 등이 보이도록 바꿔 누웠다. 그녀의 눈앞에 너무도 높고 절대 무너지지 않을 벽이 하나 더 있었다. 그녀는 마치 두개의 벽을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가 보이지 않았다. 소진은 욕실에 가 보았지만 말끔하게 정돈 되어있는 채로 비어있었다. 창문에 다가가 밖을 살펴보았지만 역시 없었다.
“아가씨 아직 있었네? 총각은 아까 일찌감치 나가던데”
식당으로 내려오는 소진을 보며 주인집 여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얘기했다. 망연자실해진 소진은 바닷가로 나갔다. 그가 어제 저녁 내내 서 있던 그 자리에 소진도 한참동안 서 있었다. 하지만 소진은 그가 왜 아무 말 없이 혼자 떠났는지,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그가 그녀에게 하고 싶던 말이 뭐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떠나기 전부터 기차 안에서도, 강릉에 도착해서도 그저 말을 삼킨 채 그녀를 바라볼 뿐 이었다. 그리고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 돌아가 버렸다.
그날 혼자서 서울로 돌아온 소진에게 그는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다. 소진 역시 그에게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소진은 그렇게 그의 존재를 잊어 가는가 싶었다. 행복했던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을 해보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음에 당황하였다. 그와 보낸 시간은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진은 점차 그를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색을 좋아했었는지, 그가 걸을 때 오른발을 먼저 내딛었는지 왼발을 내딛었는지, 그가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이던지. 그저 가슴 속 깊은 곳 그에 대한 희미한 존재감만이 잠시 동안 그녀 내부의 표면위로 떠올랐을 뿐이었다.
어느 날은 문득 그의 성이 생각나지 않아 당황하였다. 길을 걷다 문득 그가 떠오를 적에 그의 성이 김씨인지 혹은 박씨인지가 생각나지 않아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엔 기억해 내지 못하고 ‘늘 이름만 불러왔기 때문에’ 라고 스스로 위로를 하고 난 이후의 그 상실감이란. 그녀는 건망증이라고 하기엔 스스로가 느끼는 허탈감이 너무도 커 차라리 그 순간순간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소진은 그를 잊었다.
하천을 따라 기다랗게 늘어선 할로겐 등은 희미하게 푸른빛을 내며 물위에서 흔들렸다. 소진은 물고기 한 마리가 비늘을 반짝이며 물위로 튀어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이 물에는 물고기가 살 수 없다고 들었는데. 소진은 아마도 물에 비친 가로등의 불빛을 잘못 보았나보다고 생각하고 다시 숨을 고르고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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